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문단 편집) == 라이프치히 재판 == 1933년 9월 21일 방화 사건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위에 나온 것처럼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이미 독일 공산당이 금지되었고 1933년 3월 24일 [[수권법]]이 통과되었으며 동년 7월 14일 이래 독일에 오직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하나의 정당]]만이 존재하는 상태였다. 재판에 기소된 인물은 벽돌공 [[마리뉘스 판데르뤼버]](네덜란드인), [[독일 제국]] 전 의원 [[에른스트 토르글러]](Ernst Torgler, 독일인), 작가 [[게오르기 디미트로프]](Георги Димитров, 불가리아인)[* 훗날 [[불가리아]]의 독재자로 등극하는 그 디미트로프다.], 법학도 [[블라고이 포포프]](Благой Попов, 불가리아인), 제화공 [[바실 타네프]](Васил Танев, 불가리아인)로 총 5명이었다. 그 중 재판에서 현장 체포된 판데르뤼버는 방화를 인정하고 자신의 단독 범행임을 주장했지만 검사 측은 배후가 있으며 그것은 공산당이고 다른 피고인들이 방화를 방조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판데르뤼버는 1929년 네덜란드 공산당 청년조직의 일원이었지만 2년 후 쫓겨났고 '공산당원'인 적도 없었다. 다른 피고들은 화재 사건 이틀 후 공범에 대한 제보로 1만 마르크의 현상금을 걸었다. 며칠 후 한 식당 종업원이 판데르뤼버가 외국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증언하면서 체포되었는데 이들은 판데르뤼버와 일면식도 없다며 자신들의 혐의를 부인하였다. 이 재판은 세계에서 관심을 받아 재판에는 각국의 외신 기자들도 참석하였다. 재판 도중 [[괴링]]이 증인 자격으로 출석하였는데 이 때 괴링과 피고인 게오르기 디미트로프가 설전을 벌였고 여기서 괴링은 궁지에 몰리자 분에 못 이겨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괴링: 나가시오. 나쁜 놈, 나가! > >디미트로프: 제 질문이 두려우십니까, 괴링 각하? > >괴링: 나가라, 나가. 이 사기꾼아! 나가! 나가! > ><쿠르트 리스 저. 'Prozesse, die unsere Welt bewegten(세계를 뒤흔든 재판)', p561>[* 한국 정발명은 <악법도 법이다>] > (괴링이 독일 공산당과 공산주의자들을 맹비난하자) > > 디미트로프: 당신에게는 독일 공산당을 공격할 권리가 있습니다. 또 독일 공산당에게는 독일에서 계속 불법적으로 활동하며 당신들의 지배에 대항하여 싸울 권리가 있습니다. > > 재판장: 디미트로프, 본 법정에서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선전하는 것을 금합니다. > > 디미트로프: 그(괴링)는 나치를 선전하고 있습니다. > > 재판장: 선전을 엄중히 금합니다. > > <'Prozesse, die unsere Welt bewegten', p565.> 이런 달변으로 디미트로프는 유럽에서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 결국 기소된 5명 중 마리뉘스 판데르뤼버만이 내란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고 나머지 4명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히틀러는 재판 결과에 매우 격분했다고 한다. 무죄 판결로 풀려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훗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의 1인자인 [[공산당]] [[서기장]]에 오르면서 집권했다. 재판 당시 그는 불가리아에서 반란 참여로 사형을 언도받은 정치적 망명자였다. 마리뉘스 판데르뤼버는 재판 동안 정신이 온전치 못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1934년 1월 10일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단두대는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살아남아서 [[작센주]]에서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까지 일반적으로 사형 방법으로 단두대를 썼고 [[나치]]는 사형수들의 공포심을 극대화시키고자 엎드리는 게 아니라 단두대에 누워서 칼날을 보게 하는 형태로 사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이후 1967년에 유족인 형에 의해 이 사건에 대한 재심이 열려 판데르뤼버는 8년으로 형량이 감형되었다. 이후 이것도 인정할 수 없었던 유족들에 의해 항소심이 진행되어 1980년에는 방화 혐의는 그대로 인정된 채로 무죄가 선고되었으나 연방검찰이 다시 항소하면서 1983년 서독 연방 법원에서 무죄 판결이 철회되어 파기 환송되었다. 가족들이 재심 청구를 거듭한 끝에 최종적으로 2007년 [[메르켈 내각]]이 피고인이 정신질환자이며 나치 치하 정치범 재판이 공정하지 못했던 점을 감안해 판결을 무효로 하고 방화 혐의에 대해서는 따로 논하지 않고 사면복권하였다. 나치 통치 당시 재판 중에 정치적으로 악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증거나 피고의 책임능력을 엄격하게 따지지 않고 대충 판결한 사건이 꽤 있는데 독일 정부는 이들 사건을 재조사하여 문제가 있으면 판결을 무효로 하거나 재심을 통해 감형했다. 그의 고향인 [[레이던]]과 처형당한 라이프치히에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